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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보

정책 정보 - 세종시 소재 (예비)사회적기업, (예비)마을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기업당 30백만원 이하 지원) - 하시마탄광(군함도)역사왜곡 실상 말한다 - 옥수수 시럽이 지방간 유발

by 불량총각 2020. 6. 28.

 

오늘의 정책 정보는 세종시 소재 (예비)사회적기업, (예비)마을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기업당 30백만원 이하 지원) -  하시마탄광(군함도)역사왜곡 실상 말한다, 옥수수 시럽이 지방간 유발한다는 정책 뉴스가 올라와서 가지고 왔습니다.

 

 

 

 

세종시 소재(예비) 사회적 기업 - 경영안정 및 자립성장기반 조성

 

 

1. 사업목적

사회적경제조직의 경영안정 및 자립·성장기반 조성

2. 융자 규모 및 범위

가. 융자규모 : 170백만 원

나. 융자범위 : 운전자금(경영안정 등) 30백만 원 이하

 

 

 

3. 융자 대상

가. 신청일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사회투자기금 설치 및 운용 조례」제2조 제1호에 의한 사회적 경제조직으로 세종시 소재 (예비) 사회적 기업, (예비) 마을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나. 신청일 현재 금융 연체 및 불량기업으로 등재되지 않은 기업

다. 신청일 현재 국세 및 지방세 체납이 없는 기업

 

≪융자신청 제외대상≫

▶ 기업체 소재지 및 기금 지원 사업장이 관외인 경우

▶ 휴업 또는 폐업 중인 기업

 

4. 융자조건

가. 대출금리 : 연이율 1%

나. 융자한도

운전자금 : 기업당 30백만 원 이하

다. 상환조건 : 1년 거치 2년 균등 상환 또는 3년 거치 일시상환 중 선택

※ 3년거치 후 일시상환이 어려울 시,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으로 일반상품 전환이 가능함

5. 융자대상자 심의

가. 1차 심사 : 기업 신용도, 서류심사(사업계획 및 사회적 가치 등)

나. 2차 심사 : 1차 심사결과를 토대로 기금운용심의위원회 심의

※ 기금운용심의위원회 및 대출 심사 시 대상자 제외, 지원금액이 변경될 수 있음

※ 지원 우선순위 : ①코로나 19 피해기업(신규) ②사회투자기금 미 지원기업

6. 신청서류 접수 제자리

가. 접수기간 : ’ 20. 7. 6(월)~’ 20. 7. 10(금)

나. 접 수 처 : 세종특별자치 시청 참여공동체과(☎044-300-5032)

※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130, 세종시청(4층)

다. 접수방법 : 방문접수에 한하며, 근무시간(09:00~18:00) 내에만(09:00~18:00) 접수

※ 중식시간(12:00∼13:00) 및 국·공휴일은 제외

라. 제출서류

○ 공통서류

- 융자신청서 1부

- 사업계획서 1부

- 사업자등록증(사본) 1부

- 법인등기부등본(원본, 최근 3개월 이내) 1부

- 사회적 기업 인증서, 협동조합 설립신고필증 또는 확인증(사본)

- 공인회계사(세무사)로부터 확인받은 최근 3년간 결산 재무제표

※ 2019년 결산 재무제표 포함 (재무상태표, 손익계산서, 이익잉여금 처분계산서, 결손금 처리계산서) 사본 각 1부

신설 기업에 경우 3개년 사업계획서 첨부(자금계획 포함)

- 최근 3년간 부가가치세 과세표준 증명서(원본) 각 1부

- 신청기업 및 대표자 국세 및 지방세 완납증명서(원본) 각 1부

- 이사회 회의록(협동조합에 한함, 사본­원본대조필 날인) 1부

- 개인(신용) 정보의 수집·이용·제공 동의서

7. 기타 사항

가. (문의) 세종특별자치 시청 참여공동체가(사회적 경제팀, ☏044-300-5032)

나. 심사 관련 공개사항은 융자대상자 선정 여부로 한정하며, 심사내용은 비공개로 심사 결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다. 신청서와 사업계획서의 모든 내용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하며, 제출된 자료에 대해 추가 작성 및 서류 요청 시 적극 협조하여야 하며, 그 내용이 허위로 판명될 경우 또는 입증 요구에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는 심사 대상에서 제외됨

라. 접수된 서류는 일절 반환하지 않으며, 본 융자 신청 관련 소요된 제반 비용은 신청자의 부담으로 청구할 수 없음

마. 현장실사 시 융자신청 사업계획서 증빙자료*를 준비하여야 하며, 필요서류 요청 시 적극 협조하여야 함 [* 예시 : 사업장 임대차계약서, 직원 급여 대장(신청 직전 월급여 명세), 4대 사회보험 사업장 가입자 명부 등]

바. 융자금 신청 시 제출한 사업계획서상의 목적 외 사용 시, 즉시 회수 조치하며, 2년간 융자신청 제한함

사. 융자받은 기업이 타 시·도 이전, 사회적 경제기업 인증·지정 취소 등의 사유가 발생 시, 즉시 회수(융자지원 중단) 조치됨조치 됨

 

 

 

 

호사카 유지 교수-소설가 한수산,

군함도 전시관의 역사 왜곡 실상을 말한다

 

 

하시마 탄광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군함도, 軍艦島, 하시마 섬, 端島

하시마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노모 반도 서쪽, 나가사키항에서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다. 남북 320m, 동서 120m의 아주 작은 크기의 섬이었지만 1897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매립·확장 공사를 진행해 현재 하시마의 크기는 남북 약 480m, 동서 약 160m이고 섬의 둘레는 약 1200m, 총면적은 6.3ha다. 하시마를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 부른다. 이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됐고, 하시마에는 오로지 석탄 산업을 위한 시설과 노동자의 주거·편의시설만 섬 전역에 들어섰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처음 발견된 때는 하시마에서 약 4.5km 떨어진 섬 다카시마보다 90여 년 늦은 1810년께로 알려져 있다. 하시마 석탄 개발은 다카시마 탄전 개발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하시마에서는 연 20만 톤대의 석탄이 생산됐다. 그 후 시설을 확충하고 발전을 거듭해 1941년에는 41만 1100톤을 생산했다. 하시마 탄광 최고의 생산량이었다. 이후 차츰 생산량이 저하됐고, 연료를 석유로 바꾸는 이른바 '에너지 혁명'으로 석탄 산업의 불황이 이어지자 결국 1974년 1월 15일 폐광했다. 폐광 이후 하시마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됐다가 일본 정부는 '귀중한 해저탄광 유적', '일본 근대화의 상징' 등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며 2009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했다.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육지 탄광에 비해 채굴조건이 매우 나빴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석탄 증산 요구에 따라 배고픔에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 같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 '감옥섬'으로 불렸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이다. 개발사인 미쓰비시는 탄광 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각지는 물론 조선인도 모집했다. 1918년 하시마에서 941명이 갱내부에서 광부로 일했고, 이중 70명(7.4%)이 조선인이었다. 1935년 3월 26일 하시마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발생했다.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절반이 넘는 9명이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총동원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해마다 늘어 패전 직전인 1944년 8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122명이 숨졌다. 사망 원인은 악조건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장시간 노동을 해 영양부족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보이는 질병, 도망치다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사, 그리고 질식·탄광사고 등이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갱도 안은 서지 못할 정도로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다. 노역 중 돌이 떨어져 머리가 찢어지거나 이따금 떨어진 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쉴 시간은 몇 분 주지 않고, 심하게 매질을 할 때가 많았다”,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잦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도망가려 했지만 대부분 잡혀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등의 증언을 했다. 하시마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는 원폭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었다. 일본은 하시마 탄광을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지만 강제 노역과 수탈, 인권 탄압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다.

소설가 한수산 씨는 나가사키 지역 조선인 원폭 희생자를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 '까마귀'에 하시마 탄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소설에서 이들의 눈에 비친 하시마의 풍광과 혹독한 노동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됐다.

세계유산 등재

일본은 2009년 1월 5일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인 규슈·야무구치 지역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했다. 2012년 7월 3일에는 세계유산 등재 준비를 위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고 도쿄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같은 해 9월 20일 세계유산 조약과 관련한 정부기관 연락회의에서 기타큐슈시의 야하타 제철소 등 메이지 시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등재 목표 시기는 2015년이었다.

결국 2015년 7월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다. 한국과 일본은 23개 시설 중 조선인 강제 노역이 있었던 7개 시설에 대해 강제노동 사실을 반영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이 7개 시설은 하시마 탄광을 비롯해 나가사키 조선소(대형 크레인 등 3곳), 다카시마 탄광, 미이케탄광, 야하타 제철소 등이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이 시설들에 동원된 조선인은 5만 7900명에 이르고 동원된 조선인 중 사망자는 94명, 행방불명자는 4명이다.

일본은 앞서 하시마 등이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의 증거물이라고 주장하며 문화유산 등재 기간을 1850~1910년으로 한정해 강제징용에 대한 별도의 역사적 기술 없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했다. 1940년대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제외함으로써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덮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의를 제기했고,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도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이 조선인 강제노동이 있었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명시하기로 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무대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노역을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하게 된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때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이 나온 지 하루 만에 말을 바꿨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시설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밝힌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2015년 7월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따졌을 때 산업유산 시설에 조선인 동원 문제가 “강제징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와 소설 ‘군함도’ 저자인 한수산 소설가가 6월 29일(월) 오후 4시, 코리아넷* 스튜디오(서울 종로구)에서 특별 대담을 열고 역사를 왜곡한 ‘군함도 전시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는다.

*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 해외 문화홍보원(원장 김철민, 이하 해문홍)이 운영하는 정부 대표 해외홍보 매체. 9개 언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베트남어)로 한국 관련 뉴스 등을 제공해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있다.

 

방송인 정재환 씨가 진행하는 이번 대담은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군함도 전시관),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다룬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정부가 2015년 군함도 등 23개 산업유산 시설을 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에 했던 약속을 소개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일본 정부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약속을 파기한 속내 등도 석한다. 산업유산정보센터가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도쿄 시내에 자리 잡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 예정이다.

 

‘군함도’를 집필하기 위해 하시마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비극을 취재한 한수산 작가는 ‘군함도 전시관’의 전시물이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는 지난 2016년에 일제강점기 일본 하시마(瑞島)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고난을 생생하게 담은 장편소설 ‘군함도’를 출간한 바 있다.

 

진행자 정재환 씨도 군함도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한 경험을 공유한다. 정 씨는 일본 규슈 지역에 있는 한일 관계 역사 현장을 답사하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기록해 출간한 ‘규슈 역사 기행’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군함도’를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특별 대담은 6월 30일(화) 해문홍 누리집(www.kocis.go.kr)과 코리아넷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user/GatewayToKorea)을 통해 방송된다.

 

해문홍 김철민 원장은 “이번 대담은 최근 일반에 공개된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 마련했다.”라고 밝혔다.

 

호사카 교수, 미국 외교 전문지에 군함도 전시관 문제점 비판 칼럼 게재

 

한편 호사카 교수는 6월 25일(현지 시간) 미국 외교 전문지 ‘더 디플러맷'(The Diplomat)에 군함도 전시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제 강점기 하시마 섬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일본의 만행을 기억한다(Remembering Japan’s Colonial Abuses Against Koreans on Hashima Island)’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일본은 하시마 섬에서 심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증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호사카 교수의 칼럼은 정부 대표 해외홍보 매체인 코리아넷에도 게재됐고 해문홍 누리집에서는 한글로 된 칼럼을 볼 수 있다.

 

붙임 칼럼-일제 강점기 하시마 섬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일본의 만행을 기억한다(호사카 유지 교수)

 

 

 

 

 

일본이 지난 15일 일반에 공개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2015년 7월 한일 간 합의를 어긴 부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2015년 7월 나가사키(長崎)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군데’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23군데 중 7군데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린 시설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 시설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데 반대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징용의 사실을 적절하게 전시하겠다고 약속해 한국 측은 일본 측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2년 이내에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시하겠다는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거의 5년이 지난 2020년 6월 15일 도쿄 신주쿠(新宿) 구에 자리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 센터는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재단법인 ‘산업유산 국민회의’가 운영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나가사키시 소재 하시마 섬(端島=군함도) 탄광에서 한반도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전 주민들의 증언 등이 전시・소개된 사실이다. 이 전시물의 의도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징용했지만 그것은 합법이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전쟁 시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국민들을 강제 동원하는 것은 국제법에서도 인정된다는 논리를 일본 측이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도 일본 국적자였으니 일본법에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고 강변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졌을 뿐, 일본인과 같은 법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조선과 중국, 대만 그리고 일본은 서로 다른 법역(법적 구역)이었다. 법역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차별이 조선과 중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따라다녔다. 그 한 사례는 조선인 등 외지인(外地人)들에게는 보통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5년 4월 외지인에도 일본 내지의 국정선거 참정권이 주어진다고 결정됐지만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인이나 중국인, 대만인들에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의무만을 요구했고 권리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일제 차별정책의 핵심이었다.

 

일제는 탄광 노동이라는 가장 힘든 일에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전쟁포로들을 동원했다. 미국인 포로로 일본의 탄광 노동에 투입된 사람들은 탄광 갱도로 들어가서 일을 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계속 자해를 해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생생한 증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힘든 탄광 노동을 하려는 일본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탄광 노동은 죄수 노동으로 시작된 역사가 있다. 규슈의 미이케(三池) 탄광 등 큰 탄광에서는 초기에 무기징역 이상의 판결이 확정된 죄수들을 탄광 노동에 투입했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해 죄수들이 수차례 탄광에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관리자들이 죄수들을 폭행, 살해하는 등 상당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탄광 죄수 노동이 대부분 중지되었다. 이후 탄광회사들은 일본의 극빈층을 모집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자 조선인 등 식민지 사람들과 전쟁포로들을 탄광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일본인을 대신해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전쟁포로들 등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전쟁 시 강제 징용의 실태인 것이다.

 

힘든 노동 때문에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의 약 70%는 도주했다는 통계가 있다. 조선인들이 도주할 경우 이들의 강제저축은 모두 회사가 가로챘다. 일본인들은 저축통장과 도장을 본인이 갖고 있었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의 통장과 도장은 감독관이 갖고 있어 도주나 중도 퇴직 시에는 모두 회사의 돈으로 회수되었다.

 

하시마 섬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하시마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18km 이상 헤엄쳐야 했다. 이 때문에 도주하다가 익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도주하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군함도에서 감독관을 지낸 고사코 마사유키(小迫正行)씨는 1973년 10월 25일 아사히신문 나가사키(長崎) 판 인터뷰를 통해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고 증언했다. “나도 조선에 모집하러 갔고 강제적으로 조선인들을 연행했다. (중간 생략) 우리는 중국인, 대만인이나 조선인들을 평소 차별했다. (중간 생략) 전쟁 시 탄광에서는 군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든 노동을 시켰다. 도주하다 바다에서 익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패전했을 때 먼저 비밀리에 중국인, 대만인과 조선인을 감독한 사람들을 섬에서 피신시켰다.”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 정보센터에는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 증언만이 전시됐다. 아버지가 하시마 섬 탄광에서 일했다고 하는 재일 조선인 2세는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손가락질로 ‘저건 조선인이야’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라고 증언했다. 그의 아버지는 감독관이었다고 한다. 감독관 지위가 주어지는 조선인은 당시 일본으로 본적을 옮긴 사람이었고 본 적이 일본이면 일본인 대우를 받았다. 법역으로 대우를 결정한 것이 당시 일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라도 조선에 본적이 있다면 그는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조선인이라고 해도 일본인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후손 증언만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역사왜곡행위다. 일본은 하시마 섬에서 심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증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정부가 도쿄에 정보센터를 연 이유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는 2020년 7월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올림픽 때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서 도쿄에 문을 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현재 한일 간 대립되고 있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를 일본 측에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이번 정보센터를 개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해도 역사적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역사 왜곡으로 국가적 위상을 계속 떨어뜨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연구결과] 다국적 연구진, 옥수수 시럽이 지방간을 빠르게 유발해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이 새로 보고한 연구(*)에서 당류가 신체에 미치는 손상에 대해 경고하였으며, 짧으면 2주 만에 지방간과 인슐린 이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함.

대부분의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유전자 변형 옥수수에서 만들어지며, 효소의 촉매작용을 통해 옥수수 전분의 포도당 일부가 과당으로 변환되고, 포도당과 과당이 혼합된 시럽으로 형성됨.

촉매작용을 이용한 생산 방식의 생산비가 매우 낮고, 추출한 옥수수 과당의 당도가 자당보다 훨씬 높아, 가공식품업체는 자당을 대체하는 인공감미료로 옥수수 과당을 음료·아이스크림·단 간식에 첨가함.

연구진은 이중맹검 법 실험을 계획하여 18-40세의 건강한 남녀를 모집하였고, 총 세 집단으로 나누고 각 집단별 성별·체중 지표를 평균으로 맞춘 다음, 12일 동안의 음료 실험을 진행함.

세 집단은 과당이 다량 함유된 옥수수 시럽·자당 혹은 아스파탐 감미료가 첨가된 음료를 매일 3회 마셨으며, 옥수수 시럽 혹은 과당 음료는 지원자의 일일 필수 열량의 25%를 차지했음. 실험 기간 동안 연구진은 지원자들에게 표준 식이를 제공함.

실험 대상자들은 실험 전후로 간지방 함량의 방사선 촬영 및 경구 당부하검사(OGTT)를 진행함.

그 결과 옥수수 시럽 혹은 자당 첨가 음료를 마신 집단은 모두 간지방이 증가했으며, 3-hr 마쓰다 인슐린 민감지수와 2-hr 경구 포도당 민감지수 둘 다 눈에 띄게 하락했음. 즉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의 기능에 이상이 생겼음.

 

 

오늘도 성공하는 하루되세요~~